연평도는 지금도 눈물에 젖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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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를 담뿍 잡아 기폭을 올리고 / 온다던 그 배는 어이하여 아니오나~

수평선 바라보며 그 이름 부르면 / 갈매기도 우는구나, 눈물의 연평도~”

 

60년대 후반 당시 톱 가수 故 최숙자 씨가 불러 대히트를 기록하였던 노래 ‘눈물의 연평도’ 가사다. 애절한 가사, 구슬픈 음율, 절륜의 음색 등 3박자가 제대로 엮어져 탄생시킨 당대 최고의 트로트 걸작이었다. 늘 태풍을 겪는 연평 도민의 고달픈 삶도 그렇지만, 바다에 남편(또는 부친)을 잃은 이들의 望夫(父)歌로 당시 그만큼 가슴을 에이게 하는 대중가요도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 연평도는 아니지만, 한참 세월이 흐른 후 서해안 어디 어촌 출신인 저명 서예가인 한 지인의 회고담이 떠올랐다. 

ㅡ초등학교 5학년 때던가, 잠결에 언뜻 눈을 떠보니, 어머니가 노란 백열등 아래서 바느질을 하고 계셨어. 그러면서 들릴 듯 말 듯 혼자 읊조리시던 노래가 바로 ‘눈물의 연평도’ 였어. 몇 번을 계속하시더라구.

 

어머니, 당신의 처지가 바로 그와 같았다는 얘기다. 아들은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모로 돌렸을 것이고. 반세기 넘도록 지금도 연평도는 여전히 ‘아픈 섬’이다. 조기 풍어의 황금어장으로 북적이던 풍요의 섬은 언제부턴가 씨 마른 조기 대신 꽃게잡이로 버티고, 해마다 어김없이 태풍이 할퀴고 가는 길목인 데다 주변 해역에선 난파와 납북이 잊을만하면 이어져 오래된 가호(家戶)치고 피맺힌 사연 없기가 드물었으니...옛부터 이곳은 심청이가 몸을 던진  ‘인당수’로 알려져 있는 곳 아니었던가. 

 

거기에, 근년엔 北의 도발로 인한 교전과 피폭(被爆)으로 뭍에서의 일상과 생존마저 위협을 받아왔던 터라. 그 연평도 앞바다에 또 하나의 참담한 사연이 뿌려졌다. 이미 각 언론에서 도배를 했기에 그 자초지종은 넘어가기로 하자. 다만, 피해자였던 우리 국민인 해수부(海水部) 공무원의 참변을, 이 변고를 깔아뭉개려는 정상배들의 기막힌 해명에 다시 한 번 분노를 표하고자 싶다. 

 

뭐라? ‘이혼에, 노름빚에, 월북하려다 죽은 해프닝’이란다. 말하자면, 그러니 진상규명도 안타까워할 일도 없다는 얘기였다. 해상경계나 대응의 부실도 그에 묻어버리려 하고, 국민이 횡사한 날 UN총회에 종전을 외친 경박함도 누가 보냈다는 사과문에 감지덕지 싸서 버무리려 하는 기만이다.

 

삼라만상 살아있는 생명이 다 그렇겠지만, 인간 한 사람의 목숨과 그 인생은 더없이 소중하다. 정의(正義)의 뜻이 아니라면 함부로 죽게 내버려 두거나, 삶의 흔적을 제멋대로 폄하해선 안 될 일이다. 만의 하나, 설사 그가 월북하려 했던들 그렇게 처참하게 죽게 내버려 두는 건 사람의 할 일이 아니다. 

 

급작스런 변사도 하늘이 무너져 내릴 노릇일 텐데 졸지에 월북자, 파렴치한이 돼버린 고인의 가족은 남들 다 즐거운 명절 – 지난 추석을 어찌 보냈을까? 생각만 해도 처절하고 측은하기만 하다. 더구나 그분의 아들이 대통령 앞으로 보낸 손 편지를 보면, ‘그 분’은 그걸 읽고 목구멍에 밥이 넘어갔을까? 

 

15년 만에 등장한 ‘나훈아 쇼’에 열광한 다음날. 그의 입담, 비장한 어조의 ‘개구라’가 귀를 울린다. 

ㅡ왕도, 대통령도 국민 때문에 목숨 걸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 국민이 이 나라를 지켰다.”고 한 뼈아픈 한 마디, 우리에겐 그 ‘국민’마저 없어서 그런가? 

 

연평도는 지금도 눈물에 젖어있을 것이다. *

 

손용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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