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유토피아(utopia)’를 창조한 대구·경북 시민들에게 박수를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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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재앙(災殃), 재난(災難)의 뜻인 disaster를 파자(破字)하면 ‘별(astro)이 없는(dis)’ 상태가 된다. 즉 별빛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바로 재난이다.





중국에서 발생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불과 3달여 만에 아시아와 미대륙, 유럽, 호주 지역 등을 강타하며 전세계적인 역병(疫病)으로 번졌다. 이탈리아에선 중환자들이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매일 수백 명씩 사망한다고 한다. 확진자 폭증으로 의료 체계가 붕괴했다. G7 선진국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재앙이다. 일개 전염병이 전 문명 세계를 초토화하고 있다. 수십억 명의 지구촌 주민들이 하루하루를 전전긍긍 일상의 삶이 파괴되는 참사를 당하고 있다. 어둠의 시대가 인간의 삶과 일상을 파괴하는 중이다. 인류 전체 위기이자 거대한 자연의 복수가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우리 국민들은 생각과는 달리 비교적 그 후유증 대체를 잘 하고 있다는 평이다. 발병 초기, 그 원천지(중국)를 조기 차단 못하고 이어 마스크 대란을 몰고 온 정부의 실책도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잘 참고 견디는 성숙한 시민 의식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상황을 가능케 한 것은 정부 지원보다는 시민들의 차분한 협조와 의료인들의 헌신이었다. 특히 사명감으로 무장한 우리 의료인들의 사투(死鬪)가 코로나 치명률을 크게 줄였다는 보도다. 장시간 마스크 착용으로 생긴 얼굴 상처를 가린 붕대에 해맑게 웃는 간호사들의 모습이 시민들을 눈물겹게 했고, 그 난리통에서도 대구역전 화단에 펜지 꽃을 심는 할머니의 모습이 감동을 주었다. .





이들의 희생은 암흑이 된 밤하늘에서 별처럼 빛났다. 우리의 ‘진짜’ 국민들은 너무나 달랐다. 생필품 사재기도 별 혼란이 없었고, 광풍이 몰아치는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서 의외로 차분했다. 생필품 배달에 희생을 아끼지 않는 택배회사들의 공로도 지대했다. 그 중에서도 코로나 사태라는 ‘재난 디스토피아(dystopia)’의 최대 피해자였던 대구·경북 주민들의 절제(節制)가 돋보였다. 이와 같은 지역 주민들의 차분한 행동은 암담한 현실의 와중에서도 전국적으로 시민들의 공동체 의식과 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두고 지난 주말 한 언론인은 “역설적으로 재난 디스토피아에서 ‘재난 유토피아(utopia)’가 창조되는 기적의 순간이었다”고 감동의 글을 쓰기도 했다. 또한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 교수는, 파이낸셜타임스에 기고한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라는 칼럼을 통해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를 막고 시민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전체주의적 감시체제를 동원하지 않아도 된다. ‘시민적 역량강화(empowering citizens)’를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굳이 언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번 사태에 대한 대통령을 위시한 집권당 및 관련부처 장관 등 권력 상층부의 위기 관리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무능했다. 대만·싱가폴·홍콩 등은 중국과 운명적으로 가까우면서도 사태 초기에 단호한 억제 조치로 코로나 확산을 줄였다. 이는 우선 자국민을 살리기 위한 국가 리더십의 결단이었다. 반면 우리 대통령의 정략과 오판은 온 국민을 사지(死地)에 몰아넣었다. 그 와중에서도 대통령을 보좌할 집권당이나 여타 정치권은 이 위기를 빌미로 서로의 이권 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었다. 여야가 따로 없었다. 정치꾼들은 괴물화(怪物化)된 선거법으로 위성 비례 정당을 만드는 데만 올 인하며 나라를 야바위판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가장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할 국민의 생명과 국익(國益)을 헌신짝처럼 저버렸다.





한 논객(論客)은 “전염병과의 싸움은 의과학적 문제임과 동시에 중대 정치 문제다. 코로나19가 각국의 국정 능력과 협치를 시험한다. 우리 한국의 자유시민들은 무도(無道)한 지금의 정권과는 더 이상 공명정대한 역사의 길을 동행하기 어렵다. 암흑의 시대를 격파하는 궁극의 힘은 평범한 시민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훑어봐도 국난(國難)을 뚫고 나간 압도적 주체는, 권력야욕에만 집착하는 무도한 집권세력들이 아니라 늘 위기를 간파한 민초(民草)들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번 4.15 총선이 중요하다. 국정 운영을 한시적으로 위임 받은 하인이 주인인 국민을 능멸(凌蔑)하면서 종으로 부리려 들면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그렇다. 지금의 시대도 예외가 아니다. 이번의 코로나19 사태 후유증은 시민의 땀과 노력과 눈물로 치유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웅변한다. 작금(昨今)의 국내외 방방곡곡 애국시민이 원하는 바르고 진정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경북 대구 시민들이 그러했듯 우리 민초들이 앞장서서 이 어둠의 시대를 극복하면 자연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우리 ‘백성’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그 맥(脈)을 어어 왔고, 나라의 난장판을 용인하지 않았다. 특히 근세에 와서는 3.1운동이 그랬고, 해방 이후 건국 시절과 6.25 극복이 그랬고, 4.19가 그랬고, 5.16과 5.18이 그랬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민초들이 언제든 떨쳐 일어나 소매 걷고 어깨를 나란히 해왔기 때문이다 **





본 사설의 논조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손용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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