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그리움을 삭이는 방식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431회 작성일 24-03-15 17:47

본문

Apple TV+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파친코’ 시즌1에서 주인공 선자는 어머니와 함께 자기 하숙집에 손님으로 왔던 전도사 이삭의 목숨을 구하게 된다.

유부남인 줄 모르고 사랑해서 한수의 아이를 임신해 미혼모가 될 처지에 놓인 선자의 사연을 우연히 듣게 된 이삭은 그녀에게 청혼하고, 목사님의 기도로 부부의 연을 맺는다. 선자는 이삭과 함께 어머니와 정든 고향을 떠나 일본 이쿠노쿠에 있는 형 요셉의 집에서 살게 된다. 

어느 날, 몸이 무거운 선자가 늦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형님이 선자의 빨래를 해 널고 있었다. 고향의 냄새가 담긴 옷으로 그리움을 달래던 선자는 옷을 빨아서 냄새가 다 없어졌다며 서럽게 운다.

선자가 형님에게 이렇게 아린 게 언제쯤 끝나게 되냐고 묻자, 참는 법을 배우게 될 거라고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움은 사라지거나 끝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꾹꾹 눌러 참는 법을 익혀가는 거였다. 노력해도 통제되지 않는 게 감정을 다스리는 일이다.

이국에서 그리움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두 여인의 삶이 남의 일 같지 않아 선자의 아림이 내 아픔으로 다가왔다. 

딸 친구 중에 고향이 인디아인 아이가 있다. 그 친구가 보낸 사진을 보고 뭉클했던 적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면을 실제로 보아서인지 잊히지 않는다.

사진 속엔 자주색 블라우스가 벽에 걸려있었다. 옷에 초점이 맞춰진 사진이라 방안에 놓인 살림이 선명하게 부각되진 않았으나, 부유해 보이진 않았다. 그 친구의 엄마는 돌아가셨다. 아빠는 엄마가 즐겨 입던 블라우스를 일 년째 벽에 걸어 놓고 냄새를 맡으며 그리움을 달랬다.

그런데 홍수가 났다. 천장에서 비가 새는 바람에 옷이 젖어서 어쩔 수 없이 빨게 되었는데, 엄마 냄새가 사라져서 아빠가 슬퍼한다는 사연을 사진과 함께 전해왔던 것이다.

죽은 아내의 옷 냄새를 맡으며 그리움을 달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살아있는 아내를 두고도 바람을 피우거나, 아내가 죽으면 화장실에 가서 웃는 남편이 있다는 혼탁한 세상에 살다 보니 아내 냄새가 사라진 옷을 끌어안고 우는 남편이 인간문화재처럼 느껴진 건 지도 모르겠다. 

친정어머니가 48살의 짧은 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라는 표현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건지 체험했었다.

부지런했던 어머니는 빨랫줄에 널어 둔 빨래를 밤이슬이 내리도록 걷지 못했고, 늦둥이 아들이 걱정되어 눈을 뜬 채 숨을 거뒀다. 동네 어른들이 엄마가 쓰던 옷가지와 물건을 태우라고 하셨다. 그래야 훌훌 편히 갈 수 있다고.

장의사 소각장에서 태워 준다고 하여 챙겨다 주긴 했지만, 다 주진 못했다. 나 역시 엄마의 옷을 빨지 않은 채 오랫동안 끌어안고 살았다. 엄마 냄새는 그리움을 달래고 삭이는 통로가 되어주었다. 

누구나 가슴 속에 그리움이란 우물을 묻고 산다. 때로는 퍼 담고, 때로는 퍼 올리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리움의 수위를 조절하며 사는 거다.

부재나 상실에서 오는 그리움은 인력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애써 누르고 또 누르며 삭여야 한다. 그래서 때론 망각이라는 기능이 감사하다. 상실의 아픔을 매순간 기억한다면 온전한 정신으로 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움을 달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사진을 보고, 누군가는 추억하고, 누군가는 유품을 어루만지고, 누군가는 옷에 남은 체취를 맡으며 숨통을 연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지인은 마음이 힘들거나 그리울 때면 아침 일찍 남편 산소에 들러 푸념을 늘어놓곤 한다. 나 혼자 놔두고 거기 편히 누워 있으니 좋냐고 통박을 주고, 속풀이도 하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돌아와 하루를 시작한다. 

 

심성보 시인은 그의 시 「그리움이란」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리움이란

누군가에겐 행복의 사랑으로 다가오는 기쁨이지만

또 누군가에겐 떠난 사람 뒤에 오는

슬픔의 얼굴을 가진

차가운 비수 같은 것일 테지”라고. 

 

내 그리움은 어느 쪽일까? 이 세상 어딘 가에 내가 그리워서 그리움을 삭이는 이가 있을까? 근간 여러 지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때마다 삶과 죽음, 인연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나는 잘살고 있는 걸까? 눈을 뜨면 떠오르는 그리운 사람들, 차마 떼어내지 못해 끌어안고 산다.

그리움이란, 고통이기도 하지만, 산 자가 누리는 축복이기도 하다. 어쩌면 삭이지 않아도 좋을 그리움이 나를 살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리움이라면 끌어안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워할 사람이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박인애

시인, 수필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문가칼럼 목록
         이광익 (Kevin Lee Company 대표사업체 장비고장과 보험우리 나라에서 속담으로 사용하는 말 중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뜻하는 의미는 말 그대로 미리 외양간을 잘 손질하고 튼튼히 하면 자기가 아끼는 소를 잃지 않아도 된…
    보험 2025-06-26 
    오종찬(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 작곡가)1970년대의 일이다. 한국에 처음으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될 무렵 한국에는 최신형 고속버스가 도입 되었고 그 당시 고속버스 운전사는 아주 특별한 대단한 직업으로 인식이 되었던 시절이 있습니다. 아마도 한국에서의 희소성의 원칙에 따…
    문화 2025-06-26 
       공인회계사 서윤교                                                  2025년 6월 현재, 미국 상원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주도한 새로운 세제개편안, 이른바 'One Big Beautiful Bill Act' (이하…
    세무회계 2025-06-26 
      백경혜 수필가    대학 졸업을 앞둔 아들과 여행을 떠났다.  타지 생활 동안 제대로 된 여행 한번 못했던 아들이 이 길 끝에서 어떤 위안을 얻길 바랐다. 졸업식에 맞춰 다른 가족들이 도착하기 전, 며칠을 내어 스모키 마운틴으로 향했다.  굽이진 산길을 따라 올라가…
    문화 2025-06-26 
    공학박사 박우람 서울대 기계공학 학사, 석사미국 Johns Hopkins 대학 기계공학 박사UT Dallas 기계공학과 교수재미한인과학기술다 협회 북텍사스 지부장남아메리카에서 인기 있는 트레스 라체스 케익(Tres Leches Cake)은 이름 그대로 케익에 세 가지 …
    문화 2025-06-26 
    조나단 김(Johnathan Kim)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 졸업- 現 핀테크 기업 실리콘밸리   전략운영 이사엘리트 대학 입시의 이면: 성적만으로는 부족하다.미국 상위권 대학 진학 전략, 이제는 ‘클래스 구성’이 관건미국의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려는 한국 …
    교육상담 2025-06-26 
    Ryan Kim (텍사스 인저리)지난 1년간 교통사고 관련 칼럼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전달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전달해 드린 내용들을 잘 숙지하셔서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사고 시 여러분들께 도움이 되길 바라며, 마지막 칼럼에서는 그동안 다룬 핵심 내용을 종…
    법률 2025-06-20 
    오종찬(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 작곡가)  저는 꽃을 매우 좋아합니다. 마당에 가지런히 심은 각종 꽃으로부터 물가 너머로 들녘을 아름답게 장식한 이름 모를 야생화까지 마음의 한 구석 응어리진 부분을 털어버리고 세상에 영롱한 빛을 품게 하는 오색찬란한 꽃들을 좋아합니다.…
    문화 2025-06-20 
    박운서 CPA는 회계 / 세무전문가이고 관련한 질의는 214-366-3413으로 가능하다.  Email : [email protected] Old Denton Rd. #508 Carrollton, TX 75007고국에서 막 선출된 새로운 대통령과 이곳 미국과의…
    세무회계 2025-06-20 
    엑셀  카이로프로틱 김창훈 원장 Dr. Chang H. KimChiropractor | Excel Chiropracticphone: 469-248-0012email: [email protected] MacArthur Blvd suite 103, …
    건강의학 2025-06-20 
    김미희 시인 / 수필가 감격이란, 오직 자기 자신과 대상과의 관계에 깊이 몰입할 때 찾아오는 강렬한 감정이라고 합니다. 가깝지만 쉽게 닿을 수 없는 것, 눈에 보이지만 손에 넣기 어려운 순간. 특히 스포츠에는 신기록과 우승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어, 감격의 순간이 끊임…
    문화 2025-06-20 
    오종찬(작곡가, 달라스한국문화원장)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포트워스 다운타운에서 열리는 세계 최고 권위를 가지고 있는 피아노 콩쿠르중의 하나인 Van Cliburn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다녀왔습니다. 15회 우승자인 ‘선우예권’, 16회 우승자인 ‘임윤찬’ 군의 사진이 콘…
    문화 2025-06-13 
    에밀리 홍 원장결과가 말해주는 명문대 입시 전문 버클리 아카데미 원장 www.Berkeley2Academy.com 문의 : [email protected]​“이 대학에 우리 아이의 합격 챈스는 어느정도 인가요?”아마 대학입시를 앞둔 자녀의 학부모라면 제일 궁금해 …
    교육상담 2025-06-13 
    박인애 (시인, 수필가)  지난 5일, 이지원 선생님이 “미주복음방송, 통일의 소리”라는 코너에 남편과 함께 출연해서 우리 책을 소개했다며 단체카톡방에 링크를 올렸다. 궁금해서 ‘바로 듣기’를 클릭했다. 군더더기 없는 화법으로 얼마나 야무지게 말을 잘하시던지, 엄마 미…
    문화 2025-06-13 
    홍수 피해보험                                          이광익 (Kevin Lee Company 대표)                    홍수 위험 지역에서 많은 강우량으로 인해 홍수가 발생했다고 한다면 그 지역에 위치한 대부분의 주택들…
    보험 2025-06-13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