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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보호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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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245회 작성일 24-02-02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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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박사 과정 공부를 시작할 때다. 모든 것이 잘 다듬어진 미국 도시의 깨끗함과 정리된 풍경은 나를 압도했다. 그러나 늘 엽서나 그림에 나오는 도시의 모습을 보며 지내다 보니 모든 풍경이 항상 정리된 그림 같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누르고 있었다. 좀 여유 있게 풀도 있고 자연 그대로 내버려둔 내 고향의 곶자왈 같은 곳이 그리워졌다. 이럴 때 내가 발견한 곳이 학교 가장자리에 있는 워싱턴 호숫가의 야생 보호구역(wilderness area)이었다. 

워싱턴 대학 축구장 끝에 있는 조그만 나무 무지개 다리 건너에 위치한 곳인데 말 그대로 자연 그대로 개발하지 않고 야생을 그대로 둔 곳이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모든 모터가 있는 바퀴들은 출입을 금함. 주위 동물들이 놀라지 않게 소리를 내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다리 아래로 졸졸 흐르는 냇물에는 작은 송사리 때들이 수초 속을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고, 다리를 건너 내 키를 조금 넘은 덤불 사이로 난 흙 길을 따라 가면 이제는 사라져 버린 지 오랜 어린 시절의 고향의 들판이며 포장하지 않은 오솔길이 보였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무릎 정도의 키가 낮은 야생 숲이 오솔길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펼쳐 있고 조금 더 가면 큰 시골집 마당 만한 연못에 청둥오리 열 댓 마리가 한가롭게 떠 있었다. 

연못을 지나 갈대 숲 사이로 워싱턴 호수가 눈에 다가오고 호수를 가로지르는 긴 부교가 멀리 뻗쳐 있는 것이 보였다. 갈대숲과 맞닿은 호숫가에 작은 파도가 철썩거리며 물살을 일으킬 때는 예이츠의 시에 나오는 이니스프리 섬이 이런 곳이 아닌가 생각했다. 봄이 오면 정말 예이츠의 시구처럼 벌들이 언덕에 있는 찔레꽃에 붙어 붕붕 소리를 내고 있었다. 

공부로 복잡해진 머리를 표백하고 싶으면 그곳에 가서 발목이 시도록 포장 안된 땅을 밟거나 몇 시간이고 호숫가에 있는 바위에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그러면 헝클어진 생각이 저절로 풀리곤 했다. 

연구 논문을 쓸 때 꽉 막힌 머리가 조금 풀리는 것 같았고 풀릴 듯 말 듯한 문제의 해법이 이곳에서 나왔다. 

가끔 큰 바위 옆에 화구를 풀고 두 손으로 구도를 만들어보면서 스케치북을 들고 막혔던 생각을 떨쳐버리고 연못, 바위, 요트, 구름, 청동오리 등을 스케치하기도 했다. 그러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을 느끼면 바람의 방향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바뀌는지, 수학적으로 어떤 모델을 만들지 생각했다. 

내 박사 논문으로 생각이 바뀐 것이다. 어쩌다 반짝하고 이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며 운이 좋으면 풀리지 않던 문제가 풀리기도 했다. 

당시 난 박사 논문과 다른 주제로 알래스카 정부에서 ‘고래 인구조사‘라는 용역을 맡아 고래 수의 변화와 그 편차를 계산하기 위한 통계학적 모델을 생각하고 있었다. 

알래스카의 땅끝마을 노스슬롶 버로(North Slope Borough)에 있는 바로 곶(Point Barrow)을 지나 20마일을 얼은 바다 위로 가면 봄이 되어 녹기 시작하는 얼음 사이로 북극을 향해 강같이 뚫린 바닷길이 생긴다. 이 길을 통해 북극해에 있는 풍성한 먹이를 찾아서 고래들이 줄줄이 이민을 간다. 그 중에 북극고래(Bowhead Whale)라는 종류의 고래의 수를 추정하고 추정된 개수의 통계적 편차를 계산하는 일이 용역의 핵심이었다. 알래스카 원주민에게 허용된 고래 사냥 할당량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바닷길을 지나는 고래를 관측하는 장소는 얼음으로 변한 바닷가에 높이 솟은 얼음 바위를 깍아 그 위에 병풍 같은 바람막이를 설치한 곳이다. 

난 내가 앉은 바위를 관측소로 생각하고 멀리 지나가는 배들을 고래라고 가상하여 여러 가지 수학적 모델을 생각했다. 

한참을 생각에 몰두하고 있으면 어둠이 어느새 옆에 와 앉아 있곤 하였다. 이 연구로 졸업전에 네 편의 논문을 완성할 수 있어서 이 야생 보호구역은 내 고래 연구의 고향이고 바람의 방향 연구의 뿌리인 셈이다. 

아마도 야생 공원이 주는 공간의 여유로움이 나의 머리에 긴장을 풀어 막혔던 문제의 해법을 발견하게 한 것 같다. 

생각이 많아지고 문제는 안 풀리면 긴장이 머리 끝까지 뻗친다. 머리에 쥐가 난다는 표현이 적합하다. 그런데 한적한 시골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는 그곳은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마음대로 생각하고 지금까지 해오던 기존 연구와는 다른 생각을 하게 한다. 아마도 모든 것이 꽉 짜인 다듬어지고 정리된 곳에서는 들 수 없는 생각이 아닐까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하나에서 열까지 꽉 짜인 스케줄로 생활하게 하면 뭔가 이룰 것 같아 세게 밀어붙이지만 결과가 생각처럼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야생 공원같이 조금 느슨하게 풀린 상태로 놓아두는 것이 창조적인 생각을 할 여유를 찾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아직도 난 이런 야생 보호구역(wilderness area)을 자주 찾는다. 글을 쓰고 생각하기에 이보다 좋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고대진 작가

 

◈ 제주 출신

◈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 에세이집 <순대와 생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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