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칼럼

나도 한때는 당신의 여자친구였어!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781회 작성일 23-09-22 12:14

본문

목석같은 남편이 장을 봐서 부엌 바닥에 내려놓고는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장바구니를 풀어보니 작은 아이의 속옷과 내 속옷이 들어있었다. 이럴 수가. 빤쓰, 빤쓰였다. 

나는 언제부터 빤쓰를 입는 여자가 되었단 말인가. 작은 꽃무늬로 시작해서 여러 가지 색이 한 팩 안에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모두 여덟 장이었다. 요일별로 색깔 맞춰 입는 여자는 아니었지만, 속옷만큼은 예쁜 걸로 입고 싶은 여자였다. 

쇼핑가면 예쁜 속옷 가게는 꼭 들러야 했고 무엇보다 속옷 욕심은 많아서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떡해서든 가져야 했던 여자였다. 

그런데 살다 보니 나는 쇼핑하는 걸 싫어하는 이상한 여자가 되고 말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 필요한 것만 집어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오는 여자가 되었다. 항상 피곤하게 살다 보니 쇼핑몰 안을 돌아다니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피하고 싶은 큰일이 된 것이다. 

남들은 친구들하고 어울려 쇼핑도 많이 한다는데 나는 아이쇼핑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친구들과 쇼핑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나이를 더할수록 좋아하던 크리스마스 쇼핑도 미루고 미루다가 할 수 없이 막판에 달려가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점점 단순하게 살게 되었다. 속옷도 이 삼십 장씩 한꺼번에 구입해서 해를 넘기며 입게 되었다. 색을 맞춰 입는 게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가지 모양에 색깔은 두 가지로 통일했다. 

아무 때나 아무것에나 표시 나지 않는 살색과 검은색이다. 위아래 속옷을 같은 모양에 같은 색으로 통일하니 맞춰 입느라 신경 쓸 일이 없어서 좋다. 하지만, 아직은 아줌마 속옷은 선호하지 않는다. 그런데 꽃무늬 빤쓰라니.

 나도 모르게 나오는 헛웃음을 삼키며 샤워장에 서서 비누칠하는데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육십 넘어 봐. 하루하루가 다르게 느껴져.” 샤워장에서 나오니 빤쓰 한 장이 수건 옆에 나란히 놓여있었다. 남편이 슬그머니 놓고 간 모양이다. 허리까지 올라가는 게 영락없이 아줌마다. 

웃음이 나왔다. “나도 한때는 당신의 여자친구였어. 이거 왜 이래?” 허리까지 올라온 빤쓰를 입고 모델처럼 한 바퀴 돌면서 한마디 툭 던졌더니 남편도 멋쩍은지 고개를 돌리면서 한마디 한다. “잘 맞네. 응~ 아직도 예뻐.” “그래?” 하고 되묻기는 했지만, 쓸쓸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이상한 얼굴 때문에 깜짝깜짝 놀라는데, 이젠 꽃무늬 빤쓰가 어울린다니. 마음 한 모서리가 무너지는지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러잖아도 여기저기 인터넷 쇼핑몰을 들락거리며 속옷 쇼핑을 하다가 갑자기 엄마가 사다 주신 것들이 생각나 옷장 서랍을 열어 본 게 바로 엊그제였다. 

아줌마 빤쓰가 서랍 안에 가득했다. 엄마가 한국 다녀올 때마다 한 꾸러미씩 사다 주신 것들이다. 택도 떼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어떤 것은 앞부분에 지퍼로 잠그는 주머니까지 달려있어 박물관 소장품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것을 사다 주셨을까. 참 많이도 사다 쟁여 놓았다. 내 생전 입고도 남을 것 같다. 

모두 스무 해는 족히 묵은 것들이고 또, 엄마가 남기고 간 유품 같아서 도로 넣어두었는데, 이젠 꺼내 입을 때가 된 모양이다.  

며칠 전에 건조기에서 옷을 꺼내 낡은 것들을 골라내며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남편이 들은 모양이다. 

젊은 날에는 큰 소리로 여러 번씩 힘주어 말해도 반응이 없던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귀가 더 밝아진 모양이다. 

남편은 예전 같지 않게 내 작은 한숨에도 즉각 반응하고 복잡한 표정들도 잘 읽어낸다. 나이 먹으면 자식도 다 소용없고 내 편은 오직 남편뿐이라더니 맞는 말인 것 같다. 

나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이것저것 챙겨주느라 애쓰는 게 싫지 않고 날이 갈수록 익숙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얼마 전부터 남편은 코스코 팬이 되었다. 유튜버들이 소개하는 음식들을 이것저것 사다 작은 아이랑 같이 조리해서 저녁상에 올려놓고는 어떠냐고 묻는 게 취미가 되었다. 그럴 땐 꼭 알뜰한 주부 같다. 

워낙 마트 가는 걸 싫어하는 나를 대신해서 다니다 보니 평생 남편이 장을 봐서 먹고살았다. 

생각해 보니 단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싫고 짜증 나고 귀찮기도 했을 텐데. 내가 주부냐고 투덜대며 따져 묻기라도 했었으련만, 그러지 않았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때도 엄마는 나보다 남편과 함께 장을 보는 걸 좋아하셨다. 

아이들도 엄마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남편한테 부탁했다. 예전에는 뭘 사야 하는지 물었는데 이젠 아예 묻지도 않는다. 어쩌다 외식하고 마트에 들리더라도 나는 차 안에서 기다리고 남편이 장을 본다. 

그러다 보니 나는 평생을 사다 주는 것만 먹고 살았다. 그런데 이제는 속옷까지 사다 주는 걸 입어야 하다니. 서글퍼진다. 어떻게 하다 이런 삶을 살게 되었을까. 여느 아내처럼, 우리 엄마처럼 장을 봐서 냉장고 가득 반찬을 챙겨 넣으며 밥하고 빨래하며 집안일 잘하는 알뜰한 아내로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현모양처를 꿈꾼 적도 분명히 있었을 텐데. 

펄펄 끓던 나의 여름은 지나갔다. 세 자리 숫자의 기온을 유지하며 영영 떠나지 않을 것 같던 달라스의 여름도 가고 있다. 무언가를 유지하려고 나 자신을 고문하는 짓은 더는 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은 날에 가을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떨어진 것과 떨군 것들에 대해. 어떤 슬픔은 보이고 싶어 사람들이 자는 시간에 빨강의 마음을 연두로 칠하는 수국도 있다는 것을. 시간이 되면 떨어질 줄 알면서 꽃은 오늘도 웃는다. 그러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채로 그냥 놓아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김미희

시인 / 수필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문가칼럼 목록
    ◈ 제주 출신◈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에세이집 <순대와 생맥주>…
    문화 2025-05-02 
    공인회계사 서윤교  소득세 없는 텍사스, 재산세는 필수미국 50개 주 가운데 텍사스는 대표적인 ‘무소득세 주’ 다. 주정부 차원의 소득세가 없다는 점에서 은퇴자나 자영업자,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인 곳이다.  하지만 그만큼 재산세(property tax) 부담은 상대적으로…
    세무회계 2025-05-02 
    오종찬(작곡가, 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테네시주(Tennessee)를 여행하다 보면 이외의 곳에서 생소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들이 있습니다. 달라스에 사는 많은 이들이 뉴욕의 동부 혹은 아틀란타의 남부로 자동차 여행을 하면서 도로 곳곳에 널린 미국의 유수 관광지나 역…
    문화 2025-05-02 
    당신은 집보험이나 자동차 보험에 가입할때 당신의 크레딧 점수에 따라서 보험료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대부분의 자동차나 집보험 회사에서는 당신의 보험료를 산출하는 과정속에 크레딧 점수를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당신의 크레딧 정보가 …
    보험 2025-05-02 
    조진석 DC, DACBR, RMSKProfessor, Parker University Director, Radiology Residency Program at Parker UniversityVisiting Fellowship at the Sideny Kimmel Med…
    건강의학 2025-05-02 
    공학박사 박우람 서울대 기계공학 학사, 석사미국 Johns Hopkins 대학 기계공학 박사UT Dallas 기계공학과 교수재미한인과학기술다 협회 북텍사스 지부장공학 시스템을 이해하는 기초적인 접근법은 시스템에 입력을 주었을 때 어떤 출력이 나오는지 보는 것이다. 예컨…
    문화 2025-04-30 
    박운서 CPA는 회계 / 세무전문가이고 관련한 질의는 214-366-3413으로 가능하다.  Email : [email protected] Old Denton Rd. #508Carrollton, TX 75007세무보고 시즌이 마감되었다. 하지만 적지않은 납세자…
    세무회계 2025-04-30 
    박혜자 미주작가 / 칼럼리스트-저는 이 십년만에 아틀란타 옷수선 가게를 접고 수원에 정착했어요, 무엇보다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말 때문에 긴장 안 해도 되니 살 것 같네요.-부럽네요, 저는 아이들이 어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역이민은 이왕 하려면 빨리 하는 …
    문화 2025-04-30 
    오종찬(작곡가, 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2025년이 시작이 된지 어느덧 5월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달라스의 봄은 미국의 어느 곳보다 빨리 찾아와 3월이면 벌써 온 대지에 봄기운이 가득하여 수많은 꽃 축제와 더불어 각종 페스티벌이 곳곳에서 시작을 알리곤 합니다. 특히…
    문화 2025-04-30 
    조나단 김(Johnathan Kim)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 졸업- 現 핀테크 기업 실리콘밸리   전략운영 이사인공지능(AI)은 더 이상 공상과학 소설의 소재가 아니다. 준비 여부와 관계없이 AI는 이미 우리 일상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최근 주목받…
    교육상담 2025-04-30 
    버클리 아카데미  원장 제임스 서 (James Seo)UC Berkeley (Molecular Cell Biology, B.S.)UCLA David Geffen School of Medicine텍사스에 눈이 오던게 엊그제같은데 벌써 여름방학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라디오칼럼 2025-04-29 
    버클리 아카데미  원장 제임스 서 (James Seo)UC Berkeley (Molecular Cell Biology, B.S.)UCLA David Geffen School of Medicine 새로 출범한 트럼프 정부가 경제, 정치는 물론 교육과 입시에도 큰 변화를…
    라디오칼럼 2025-04-29 
    Ryan Kim (텍사스 인저리)교통사고 후 받는 치료 중 재활치료, 통증의학 치료, 심리 치료에 대해 이번에는 자세히 이야기해 보려 한다. 지난 번에 언급한 대로 기본적인 치료 이후에 권하고 진행되는 치료들은 환자의 상태와 부상의 심각도에 따라 달라지게 되므로 모든 …
    법률 2025-04-18 
    공사중인 건물보험이광익 (Kevin Lee Company 보험사 대표)근래에 들어 한인타운내에 자체 건물을 짓는 한인 교민들도 많아지고 있다.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개인이 많아지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한인사회의 경제 규모가 커지고 있는 것도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
    보험 2025-04-18 
    오종찬(작곡가, 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예전의 텍사스의 날씨와는 사뭇 다르게 변덕스럽고 가을처럼 선선한 날씨를 느끼며 달리다 보니 벌써 5월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4월, 5월이면 텍사스에서는 왕성하게 활동하기 가장 적당한 기온을 유지하는데 곳곳에서는 각종 페스티벌이 우…
    문화 2025-04-18 

검색